2021학년도 상담센터이용후기 공모전 장려상3 작품 '집단상담' N
No.1820034학생상담센터 이용후기
2021학년도 이용후기 공모전 장려상 작품
(학과 이름 등 개인정보를 제외함)
책 인간 실격 속 요조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런 가당 찮은 단어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인정하고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를 통틀어 다시는 없을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소영, 더스토리(2021.09))
언젠가 부터 제 삶 속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고귀하며 과분하기에 나라는 존재는 그에 미치지 못하며 내 인생 속 그 단어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나 자신을 깊고 깊은 수렁에 빠트려 상처와 피, 약물로 점철된 그곳엔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과 억누를 수 없는 눈물만이 존재합니다. 사람들과 만날 때 입가에 띤 미소는 요조의 말처럼 얼굴에 잡힌 흉한 주름과 다름없습니다.
나 자신을 지옥 끝까지 몰아넣어 입안이 터질 정도로 자살을 곱씹습니다. 그럴 용기마저 없는 한심한 인간인 걸 알게 되면, 이전에 겪었던 고통과 본인의 나약함을 저주하며 날카로운 칼 끝을 희멀건 살갗에 갖다 댑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과거의 추악함과 허튼 시간을 보내는 현재, 두 눈을 뜨고 있어도 검은 장막으로 둘러싸인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의 초라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떫은 눈물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섞여 들어도 상처를 내는 행위는 그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나는 이런 고통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 순간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압니다. 그 후, 앳된 시절부터 마음속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나는 언젠가 내 손으로 생을 마감할 사람이라는 걸.
눈물범벅이 된 상태로 잠이 든 후 깨어나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팔목에 가로 새겨진 혈흔을 보면 찬기가 든 공허함만이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낚싯줄에 불과한 선 위에 두 발을 디딘 채 또다시 삶을 연명해갑니다.
어릴 적 순수하게 그렸던 꿈과 미래. 이제 그런 것들은 몽상이라는 이름으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사라졌지만, 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결국 ‘살아야겠다’라고 마음먹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캄캄한 한밤중 희미하게 켜진 초롱불과 다름없어도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면 이러한 저 역시 사람들 속에 섞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떠올립니다. 그렇게 신청한 것이 2021학년도 하계방학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사진 치료 집단상담이었습니다.
집단상담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나의 아픈 구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담은 중학생 시절 자살 문제로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한 이후로 오랜만이었습니다. 각자가 느끼는 아픔의 강도를 감히 추측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지만 굳이 서술하기 위해 말한다면, 나와 비슷한 혹은 더욱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그 어떤 개인 정보를 알지 못한 채 각자 하나의 가명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예상 외의 사실이지만 뭉그러진 감정과는 달리 모두의 가명은 순수하고 따뜻했습니다. 어쩌면 그곳의 우리는 그것처럼 다정한 단어들이 자신을 보듬어주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이틀 동안 총 3~4개 정도의 집단 상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집단 상담 후기에서는 그중 제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하였던 상담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상담 과정이 모두에게 익숙해지고 시간이 좀 지났을 때쯤, 상담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겪었던 고통을 가장 자세히 드러날 수 있는 사진을 다섯 장 찍어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 상처를 상세히 드러낼 수 있는 사진이면 더욱 좋다고 하셨으며, 제대로 마주해야 치유할 수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사실 많이 망설였습니다. 아무리 각자의 개인 정보도 모르며 가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자리일지라도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에게 제 상처를 드러내는 게 무서웠습니다. 또 그로 인해 저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더 심한 트라우마로 남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따로 개인 상담을 진행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이번 기회에 저의 곪아있던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이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상담센터 건물 근처의 횡단보도로 달려가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그 횡단보도 사진은 사실 제가 사는 집 앞에 있는, 지금도 마주하는 횡단보도를 의미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자리에 앉은 후 자신의 상처와 연결된 사진을 각자 설명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감과 공포감으로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괜히 이 사진을 찍었던 걸까 수없이 초조해 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차례가 오고 횡단보도 사진이 띄워졌습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댔습니다. 그 사진은 중학생 시절, 저의 상당한 우울감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겪고 있는 칼로 짓이기듯 한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서는 공부에 대한 강박관념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 학년 때부터 문제 하나를 틀릴 때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야 했으며, 제가 맞기 싫다고 무릎을 꿇고 운다면 부모님께서는 그에 못지않고 온몸을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초리가 부서진다면 빗자루를 들고 저를 때리셨습니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그만두셨고 사실 그로 인해 전교권에 들 정도로 성적이 오른 건 사실입니다. 온몸에 새겨진 그때의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 갔지만, 문제는 심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공부 때문에 동아리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저는 상위권에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해졌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착한 아이,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한심하고 쓸모없고 필요 없는 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저를 서서히 무너트리기 시작했습니다.
횡단보도를 걷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 앞엔 전교 1등을 하는 아이가 서 있었고 저는 그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그 당시 저는 저보다 등수가 높은 아이 앞에서는 고개조차 들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교 1등인 아이 앞의 저는 살아갈 의미조차 없는 아이, 인간미만의 생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이것은 과거에 성실하지 않은 저의 탓이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무거운 머리를 조용히 들어 앞을 바라본 순간, 저는 제 눈에 비친 허상과는 다름없는 무언가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현실은 정말 꿈과 같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등에는 1이라는 회색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 아이의 등에 그런 글자가 적혀 있다면 제 등에도 저의 전교 등수가 드러나는 글자가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죽어야겠다.
어쩌면 과하게 포장해서 말한다며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전부를 드러내는 결과가 이와 같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누군가 저를 차로 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마땅한 인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 당시 제 나이는 만 14살이었습니다.
제가 칼을 들어 손목을 긋는 시점도 그때가 시작이었습니다. 공부하다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한계에 부딪히면 자신을 끊임없이 저주하며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라 믿었습니다. 그 당시 제 인생엔 공부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죽는 것 말고 더는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사건은 결국 치유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현재까지 제 목숨을 좌우하는 증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집단 상담을 하는 자리에서 횡단보도 사진을 바라보며 이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이 얘기는 사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얘기하다 중간에 숨이 턱턱 막히고 덜덜 떨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 장소에서 입에 담기에는 좀 과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찬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죽고 싶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거북하고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지금도 죽고 싶다는 감정이 드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언젠가는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과거 저는 죽음이 제 머릿속을 가득 찰 때면 약도 한 움큼 먹고, 줄로 목을 칭칭 감아 숨이 막힐 때까지 졸라보았으며, 제 방 창문으로 뛰어내릴 생각도 끝없이 했습니다. 그럴 때면 죽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 아닌 ‘죽어야겠다’라는 의지가 온 정신을 가득 메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고 저는 너무 많은 걸 털어놓았다고 생각해 아차, 싶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학생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각자 하나의 무언가를 선물 하자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문장, 단어였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 순간 그들이 제게 건넨 것은 공기 중에 금방 사라져 내일이면 당장 잊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저는 아직도 생각합니다. 그들이 제게 말한 한마디, 한 단어는 어쩌면 어둠으로 둘러싸인 고통 속, ‘그들이 다시 살겠다고 다짐할 때마다 되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나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을 받은 행운아 일지 모른다고.
그러니 살아가도 된다고.
그 후 선생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저에게 약속 하나만 하자고 하였습니다. 다시 이곳에 올 때까지 살아있겠다고. 두 번째 상담은 다음 주 같은 요일이었습니다. 사실 우울증이란 건 한순간 닥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말 뿐인 약속이 될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약속이라는 것의 무게란 꽤 무겁다고 생각해 순간 망설였지만, 상담에 참여했던 분들에 제게 건넨 말을 떠올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모두의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상담에 참여했고, 여태 살아있습니다.
사실 상담 이후 지금까지 우울증이 제게서 사라진 건 아닙니다. 7년 동안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인데 그 하루 만으로 치료 되었다고 하면 오히려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 후 우울함에 잠식될 때면 당시 집단 상담에 참여한 분들이 제게 적어주신 롤링 페이퍼를 보며 그 상황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그리곤 숨을 한 번 더 내쉬며 참여 학생 분들이 제게 했던 말을 되뇝니다. 그럼 잠시 나마라도 평온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6개월 정도 지났기에 모든 단어나 문장들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집단 상담에 참여했던 분들이 제게 그런 따뜻한 말을 해줬다는 기억 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집단 상담을 하면서 처음에는 저를 괴롭히는 고통을 너무 많이, 너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말해서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집단 상담이 저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 시발점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울증을 전부 치료한 것이 아니기에 어쩌면 만 14살 때 시작된 고통을 앞으로도 몇 년, 혹은 평생 떠올리며 아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 상담에서 많은 분에게 용기 내 털어놓았다는 사실과 그분들이 제게 건넨 말 한마디를 떠올리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쩌면 제 인생에도 행복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낯선 경험이었고 초반에는 두려웠지만, 집단상담에 참여한 건 정말 잘한 경험인 것 같습니다. 저처럼 많이 힘들고 아파하는 분들이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집단 상담에 참여하셔서 인생의 전환점은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변화라도 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