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학년도 2차 이용 후기 공모전 장려상3 작품 '개인상담' N
No.1514409학생상담센터 이용후기
2020학년도 2차 이용 후기 공모전 장려상 작품
(학과 이름 등 개인정보를 제외함)
<과거를 벗어나 현재로>
나는 가만히 있다가도 과거에 힘들었던 일들이 바로 하루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하게 재연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겪을 때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만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었다. 나를 괴롭혔던 과거는 중학생 때 갑자기 시작된 가난과 고등학생 때 처음 겪었던 왕따 경험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 그거 하나였다.
나는 힘들었던 과거가 생생하게 재연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이유로 학생 상담 센터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 영남대 어울림 사이트를 통해 상담을 신청한 이유는 ‘코로나 블루’ 때문이었다. 평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답답해서 카페에서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나서는 집에만 있게 되었고 그래서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것 같았다. 어울림 사이트를 통해 상담을 신청하고 간단한 절차를 거쳐 본 상담이 시작되었다. 본 상담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제는 코로나 블루에서 트라우마 치료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코로나 블루 등 내가 겪고 있던 모든 문제의 핵심이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트라우마로 남게 된 일들이 시작된 시점은 중학생 1학년이었다. 꾸준히 부부싸움을 하시던 부모님께서 크게 싸우신 이후 내가 중학생 1학년이 되는 시점에 별거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특별한 직장이 없으셨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크게 겪어본 적 없었던 가난을 겪어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고 나서는 ‘못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기분이었다. 동생들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기 때문에 식구가 많았는데도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원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룸에서 탈출하여 방이 2개 있는 반지하로 옮길 수 있었다.
아버지 집을 다 함께 나오고 나서 몇 년 동안이나 세탁기, 냉장고 등 기본 가전제품이 없어서 겨울에는 손빨래를 해야 했다. 학교 다녀와서 조금 있다가 저녁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빨래를 밟고 직접 손으로 빨래를 짜고 널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어머니까지 나를 의지하는 상황에서 어린 나이었지만 의지할 데가 없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사춘기가 겹쳐져 나는 점점 더 예민해져만 갔고 몸무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늘어난 몸무게 탓인지 자존감은 점점 떨어져 갔고 예전과 다르게 친구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친구 관계에 있어서 최악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반에서 왕따가 된 것이었다. 함께 무리를 지어 다니던 친구들이 내가 먼저 시작하지도 않은 뒷담화를 해당 친구에게 들키자 나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내가 먼저 시작했든 아니든 내가 뒷담화를 했다는 사실은 진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학교폭력을 하고 반 친구 전체에게 말을 전달해서 반 전체 왕따가 된 뒤에도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순간적인 뒷담화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고자 희망을 붙잡는 것처럼 붙들고 있었던 수학 개념원리 문제집이 없어졌고 내 교복 겉옷이 없어졌다. 이 밖의 어려운 상황은 학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왕따가 되자 같은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가 제일 먼저 나를 배신했다. 모든 지옥 같은 일들이 내가 뒷담화를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으로 자신을 공격했고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말할 수 없었다. 일이 커지자 선생님께서도 개입하셨지만, 쉬쉬하기 바쁘셨다. 나를 힘들게 하는 학생을 불러 상담을 하는 등의 기본적인 조치는 취하셨지만, 장학사가 되는 과정에서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준까지였다. 진심 어린 관심은 없었다. 그해 혹은 다음 해에 우리 학교는 ‘몇 년 연속 학교폭력 zero 학교’로 상을 받았다. 중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도 친구도 나를 의지하시는 어머니도 말이다. 왕따였던 나에게 다가왔던 친구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사이비 교회로 나를 전도하려는 속셈이었다. 학교에서는 전전긍긍하며 학교생활을 하고 집에 가서는 가난 때문에 어머니와 매일 싸웠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내 정신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만큼 모든 상황이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상담 선생님께 내가 겪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고 처음으로 진심 어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진심 어린 위로를 받고 나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어서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면 혼자이기 때문에 zoom(비대면)으로 상담을 해도 방해받을 일은 없었다. 상담을 깊이 있게 진행하면서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위로 떠올려서 강물에 물이 흐르듯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여러 번 거치면서 나는 과거의 일들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을 진행하면서 트라우마 치료의 일환으로 고등학생 때 나를 힘들게 했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볼 수도 있었고 과거의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전해보기도 했다. 상담 전에 ‘오늘은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내가 겪은 일들을 스스로 정리해보았던 것도 트라우마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 몇 달을 걸쳐 상담을 진행하는 사이에 아주 어렸을 때 가족이 화목했던 그 시절에 살던 집도 찾아가 보았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게 해주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망가질까 봐 옛날 집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상담을 진행하면서 용기를 얻었고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그렇게 그곳을 다시 찾으니 그때의 행복감을 잠시나마 다시 느낄 수 있었고 문뜩 ‘아, 내가 지금도 새롭게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